2류 정치, 3류 행정, 4류 기업

김상조 | 경제개혁연대 소장, 한성대 교수   작성일시: 작성일2013-06-12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라고 한 삼성 이건희 회장의 발언이 커다란 파문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다. 당시 김영삼 정권은 발끈했고, 이를 진화하느라 삼성은 진땀을 흘려야 했다. 1995년 삼성 이건희 회장의 베이징 발언은, 1992년 현대 정주영 회장의 대선 출마와 더불어, 정치권력에 도전하는 경제권력의 달라진 위상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무소불위의 경제권력은 민주질서를 위협하는 암적 요소라는 의미에서 이건희 회장의 발언은 비판받아 마땅하나, 사실 액면 그대로만 보면 크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많은 국민들이 통쾌하게 생각한 측면도 있었다.


그러면 20년 가까이 지난 현 시점에서도 그 말이 여전히 유효할까? 행정이 3류인 건 변함이 없는 듯한데, 기업과 정치의 순위는 다시 생각해볼 대목이 있다. 먼저, 정치부터 보자. 나는 요즘 박근혜 대통령의 행보를 보면서 두려움을 느낀다. 과거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음습한 공포를 다시 떠올린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 딸이 주도하는 한국 보수진영의 놀라운 변화를 목도하면서 작금의 진보진영이 직면한 심각한 위기를 절감한다는 뜻이다.


지난해 두 차례의 선거를 치르면서 박근혜 대통령은 진보진영의 전통적 의제인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를 자신의 것으로 끌어안았다. 또한 최근 정부가 연이어 발표한 ‘고용률 70% 로드맵’과 ‘창조경제 실현 계획’ 등을 ‘선입견 없이’ 읽어보면, 진보적 시민사회단체의 요구와 상당부분 겹친다. 한국의 보수진영이 진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결과 과거 보수진영의 기형성을 전제로 형성되었던 진보진영의 주장 중 많은 부분이 논리적 정합성과 대중적 호소력을 잃게 된 반면, 이를 대체할 새로운 진보적 가치와 그 실현 방법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그래서 2007년 패배보다 2012년 패배가 진보진영에는 더 큰 위기로 다가오고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물론 트집 잡기로 마음먹으면,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재벌구조는 그대로 놔둔 채 단지 잘못된 행위만 제재하겠다고 한 경제민주화 공약이나, 직접 증세 없이 단지 예산 절감과 세원 확대 등을 통해서만 135조원의 재원을 조달하겠다고 한 복지공약은 보수 대통령으로서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또한 2017년까지 고용률 70%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연 47만6000개의 일자리 창출 중 상당부분을 시간제 일자리로 채우겠다고 한 것이나, 여전히 실체가 모호한 창조경제 개념을 아무 데나 갖다붙이는 것을 보면, 권위주의적 리더십의 한계와 함께 왜 아직 행정이 3류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은 짝퉁이며 따라서 조만간 실패할 것이라는 예측이 정당할까? 글쎄다. 설사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5년 후 진보진영의 승리를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보수가 진화한 것 이상으로 진보의 혁신이 요구된다. 그것이 진보가 살길이다. 이러한 상호작용이 이어진다면 한국의 정치는 4류라는 오명을 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쉽지 않아 보인다.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 실천 의지도 미덥지 않지만, 솔직히 민주당·진보당·안철수신당(?) 등의 혁신 능력이 더 걱정이다.


한편 기업은 어떤가? 2류를 넘어 1류로 발전하고 있는가? 천만에 말씀이다. 글로벌 금융위기와 아베노믹스 등으로 인해 실적이 곤두박질치고 있다는 걸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재계의 근시안적 시각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단적인 예로, 재계 대표, 아니 재벌 대변인을 자처하는 전경련은 ‘기업들이 생산기지를 해외로 이전하는 경제 엑소더스가 나타나고 있다’며, 6월 임시국회에서의 경제민주화 입법에 제동을 걸었다. 법인세 증세 논의·과도한 기업 규제·납품단가 조정 어려움·엔화가치 하락·높은 생산요소 비용·경직적 노사관계·반기업 정서 확산 등을 경제 엑소더스의 7가지 요인으로 꼽았는데, 그 논리적·실증적 근거의 허접함은 둘째 치고, 불길한 과거 기억을 연상시키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1990년대 중반에도 반도체 호황을 누린 삼성전자를 제외하고는 모든 기업들, 특히 중소기업들이 빈사 상태에 있었다. 그때도 전경련은 고임금·고금리·고지가·고물류비·고규제·과소비 등 6가지 장벽이 기업을 압박하고 있다는 ‘고비용·저효율 구조론’을 들고 나와 본사를 해외로 옮기겠다며 정부와 국민을 협박했다. 이처럼 재벌들이 개혁을 거부했던 결과가 바로 1997년 외환위기다.


지금 전경련의 모습에서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다면 억지인가? 정치인들도 시대의 흐름에 순응하여 변화하는데, 하물며 기업이 그 흐름을 거역하고 모든 이해관계자들을 적으로 돌리고서도 살아남기를 기대하는가? 지난 4월 선언한 전경련의 개혁이 겨우 이건가? 정말 이런 말 쓰지 않으려 했는데, 스스로 4류임을 증명하는 전경련은 차라리 해체하는 것이 낫겠다.



* 이 글은 경향신문 6월 12일자에 실린 글로 필자의 양해를 얻어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