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의 비명과 먹물의 한계

김상조 | 경제개혁연대 소장, 한성대 교수   작성일시: 작성일2013-05-22   

요즘 한국 사회의 최대 화두는 단연 갑을(甲乙) 관계다. 라면상무·빵회장·우유팀장 등 지위고하를 불문한 갑의 횡포가 상상을 초월했고, 이에 따른 을의 비명이 사회적 분노로 표출되고 있다. 필자도 갑을 간의 지배-종속 문제가 이토록 심각한 줄 몰랐다. ‘먹물의 한계’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재벌개혁이라는 표현만으로는 담아낼 수 없었던, 경제민주화의 진정한 의미를 재발견하게 된다. 이제 정부와 정치권이 호들갑을 떨 차례가 되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형 유통업체들의 밀어내기 관행에 대해 “새 정부에서는 결코 있어서는 안될 일”이라고 강력 경고했다. 이에 공정위·국세청·검찰·경찰 등 법집행 기관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다. 또한 최근 지도부를 재구성한 여야 정치권 모두가 6월 임시국회에서 ‘갑질’을 규제하기 위한 경제민주화 입법을 다짐하고 있다.


다 좋은 일이다. 만시지탄이지만,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해야 한다. 그런데 걱정이 앞선다. 냄비처럼 확 끓어올랐다가 이내 식어버린 경우가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먹물 근성이 다시 발동한다. 갑을 관계로 요약되는 불공정거래 관행을 근절하기 위한 방안을 체계화할 필요가 있다.


먼저, 지난 14일 새누리당 경제민주화실천모임 주최의 정책간담회에서 발제자로 나선 이종훈 의원은 3배 손해배상제도, 집단소송제도, 사인의 행위금지 청구제도, 공정위 결정에 대한 신고인의 불복 기회 부여, 내부고발자 보호 및 보상 강화 등 5가지 사후 피해구제 수단의 도입을 제안했다. 이 모두에 대해 필자는 대환영이며, 공정거래법의 즉각적인 개정을 촉구한다. 새누리당에서 이런 주장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한국 사회의 진보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재벌개혁 운동의 일환으로 다수의 주주대표소송을 진행한 바 있는 필자로서는 소송 수단의 잠재력과 함께 그 한계도 잘 알고 있다. 무엇보다, 피해 당사자가 직접 소송을 제기할 유인이 너무 적다. 특히 하도급이나 대리점 등의 갑을 관계에서 을이 갑에게 소송을 낸다는 것은 ‘장사 그만하겠다’는 뜻과 마찬가지다. 3배 배상이나 집단소송을 통해 소송 유인을 강화할 수는 있으나, 그 변화의 속도는 너무 느리고, 우리의 갑을 관계는 그렇게 한가하지가 않다.


따라서 피해구제 수단의 강화는 반드시 필요하나 장기 대책이라는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고, 보다 직접적인 규율 수단이 필요하다. 특히 주무부서인 공정위가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현행 공정거래법 23조 1항 4호는 ‘거래상의 우월적 지위를 남용한 불공정거래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여기에는 구입 강제, 판매목표 강제, 불이익 부과 등 최근 남양유업·농심·배상면주가 등에서 문제가 된 갑의 횡포가 다 포함된다. 따라서 공정위가 ‘할 수 있었는데도 하지 않은 것’이 너무 많고, 이에 대한 국민적 질타는 당연하다. 공정위의 법집행 의지가 경제민주화의 요체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한편, 공정위가 ‘하고 싶어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제약’도 풀어주어야 한다. 앞서 언급한 현행 법규정은 아주 추상적이어서 공정위가 우월적 지위 남용 행위의 부당성을 입증하기가 쉽지 않다는 문제도 분명 있다. 그래서 야당과 시민단체에서는 대리점 등의 보호를 위한 특별법 제정을 주장하고 있는데, 그 충정은 십분 이해하나 생각해볼 대목도 있다. 논란이 되는 사안마다 특별법을 제정하는 게 합리적인가 의문이 있고, 또 어차피 시행령·공정위 지침 등의 하위법령에서 구체적인 내용을 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화점 등 대규모 소매업의 불공정거래 행위 규제의 예와 같이, 공정위 고시를 통해 ‘특수 불공정거래 행위’의 한 유형으로 정해 규제를 해보고, 그래도 안되면 특별법 제정으로 가는 것이 순서가 아닌가 한다. 또한 공정위가 제대로 조사·심사를 할 수 있도록 예산·인력을 늘리는 것도 반드시 필요하다. 공정위의 심사관 한 명이 대기업이 고용한 대형로펌의 쟁쟁한 변호사들을 상대하는 것도 불공정 경쟁이다.


마지막으로, 사전적으로 을의 협상력을 제고해야 한다. 그 근본적인 대책은 다수의 을이 공동으로 갑을 상대하는 것을 인정·지원하는 것이다. 일대일의 갑을 관계에서는 대등한 계약을 맺을 수 없고 이를 사후적으로 교정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경제적 약자들의 공동행위는 강자와의 수직적 네트워크를 공정하게 만드는 효과(경제민주화)만이 아니라 약자 상호 간의 수평적 네트워크를 활성화시켜 경쟁력을 높이는 효과(창조경제)도 있다. 경제민주화가 뭔지 창조경제가 뭔지 모르겠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높다. 어떻게 정의하든, 경제적 약자들이 힘을 모아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게 하는 것이 경제민주화와 창조경제의 출발점이다. 여기에 보수 정부로서 박근혜 정부의 성패가 달려 있다. 또한 보수 정부의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어떻게 돌파하느냐에 진보 진영의 사활이 걸려 있다.



* 이 글은 경향신문 5월 22일자에 실린 글로 필자의 양해를 얻어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