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러코스터 탄 경제민주화

김상조 | 경제개혁연대 소장, 한성대 교수   작성일시: 작성일2013-05-01   

세상사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일들이 술술 풀리는 경우도 있고,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꼬여 버린 경우도 있다. 심지어는 이 두 가지 모순된 상황이 거의 동시에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민주화 공약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최근 법원이 재벌총수에게 실형을 선고하면서 바로 법정구속하는 일이 연이어 벌어졌다. 공정위는 일감 몰아주기 등 총수 일가의 사익추구 행위에 대해 강력한 규제 방안들을 내놓았다. 감사원은 증여세 포괄주의 원칙을 방기한 기획재정부·국세청을 질타하는 감사보고서를 발표했다. 인수위가 국정과제 보고서에서 경제민주화라는 용어 자체를 날려버렸음에도, 대통령이 경제민주화 공약의 실천에 대해 일언반구조차 하지 않았음에도, 예정된 경로를 따라 경제민주화 과제가 착착 진행되는 듯한 느낌을 줄 정도였다. 이러다가 보수정권하에서 경제민주화, 특히 재벌개혁의 핵심 과제들이 상당부분 성취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기대(!)와 우려(?)를 낳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경제민주화는 대기업 옥죄기가 아니다’라는 대통령의 말 한마디를 촉매로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재계의 반격이 폭발했다. 여기에 보수언론이 기름을 부었다. 아베노믹스에 따른 엔저 현상으로 수출기업들의 채산성이 급전직하하고 있고, 대형 건설사들조차 과거 회계장부의 분식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곤두박질친 실적을 내놓고 있으며, 대기업들이 사상 최대의 현금을 쌓아두고서도 설비투자는 바닥을 기고 있다는 등의 ‘속 보이는 기사들’이 홍수를 이루었다. 그 와중에 개성공단 폐쇄 등 남북 간 긴장관계는 브레이크 없는 폭주기관차처럼 상호작용하고 있으니, 경제민주화 속도조절론이 힘을 받는 것은 삼척동자도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박근혜정부의 경제민주화가 어떤 속도로 어느 수준까지 갈지 누구도 알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새 정부 출범 이후 두 달여의 짧은 기간에 경제민주화의 진로가 롤러코스터를 방불케 할 정도로 요동을 친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가장 간명한 대답은 ‘경제민주화의 후퇴’일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민주화가 내용적으로 후퇴한 것은 없다. 지난해 11월 김종인 국민행복추진위원장과의 갈등 과정에서 드러났듯이, 박 대통령은 재벌의 소유구조나 경제력집중 구조에 직접 손을 댈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다만 재벌의 사익추구 및 불공정거래 행위를 엄격하게 사후 제재하겠다는 것만 공약했다. 잘못된 구조는 놔두고 잘못된 행위만 제재하겠다는 것이다. 애초부터 박 대통령의 경제민주화는 거기까지다.


문제는, 재벌의 잘못된 행위를 제재하는 데 필요한 정부·여당의 법개정안 수위, 그리고 감독기관의 법집행 강도가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좌우되는 상황을 만들었다는 데 있다. 대통령이 어떤 시그널을 보내느냐에 따라 온탕과 냉탕의 양 극단을 오가는 상황을 피할 길이 없게 됐다. 인수위의 국정과제 보고서가 경제민주화를 창조경제의 수단으로 전락시켰다는 비판이 제기되자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경제민주화를 창조경제와 동렬의 개념으로 복권시키는 표현을 끼워 넣어야 했다. ‘대기업 옥죄기 아니다’라는 발언 이후 속도조절론이 횡행하자 대통령은 공정위 업무보고 자리에서 자신의 경제민주화 원칙을 원론적인 수준에서 다시 부연설명해야 했다. 언제까지 이럴 건가. 구차하다. 그럼에도 이런 일은 계속 반복될 것이다. 그래서 더 안타깝다.


나는 박근혜 대통령이 내건 경제민주화 공약을 폄하하지 않는다. 보수정당의 보수대통령이 재벌의 사익추구 행위와 불공정거래 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공약한 것만 해도 한국 사회의 엄청난 발전이다. 박 대통령이 하지 않겠다고 한 것은 5년 후에 진보진영이 집권해서 하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박 대통령의 경제민주화 공약이 철저하게 실천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박 대통령이 보다 분명하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고, 그 메시지가 대통령의 입에서만 맴돌 것이 아니라 경제정책의 컨트롤 타워에 의해 혼선 없이 표현되도록 해야 한다.


경제민주화가 아무리 중요한 시대적 과제라고 할지라도, 경제정책의 유일한 목표는 아니며 하루아침에 달성될 일도 아니라는 건 원론 수준의 이야기다. 상황에 따라 경제정책의 우선순위를 탄력적으로 조정해야 한다는 걸 모를 사람은 없지만, 속도조절론의 탈을 쓴 개혁 저지 의도를 간파하지 못할 만큼 어리숙한 사람도 없다. 재계와 보수언론이 경제민주화 저지 의도를 노골화한 현 상황에서 대통령이 뒤늦게 속도조절론을 주워 담는 구차한 모습을 반복해서는 안된다. 잘못된 행위를 엄정하게 제재하겠다는 공약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잘못된 의도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경고해야 한다. 특히 정부·여당 내부의 잘못된 의도부터 단속해야 한다. 실패의 씨앗은 내부에서 자란다.



* 이 글은 경향신문 5월 1일자에 실린 글로 필자의 양해를 얻어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