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의 잃어버린 ‘낭만에 대하여’

김상조 | 경제개혁연대 소장, 한성대 교수   작성일시: 작성일2012-12-24   

한마디로 ‘멘붕’이다. 박근혜 후보가 이기고 문재인 후보가 졌기 때문만이 아니다. 50대 유권자의 투표 성향이 승패를 갈랐다는 사실이 더 충격적이다. 유권자 수 비중으로는 19.2%인 50대, 그중 89.9%가 투표했고, 그중 62.5%가 박근혜 후보를 선택했다. 믿기지 않는 숫자들이다.


한국 사회에서 50대는 평균적으로 어떤 사람들인가. 한국전쟁 이후 출생한 베이비붐 세대로서, 1970년대 유신치하에서 대학을 다니거나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1987년 민주화 운동 당시 넥타이 부대의 한 축을 담당했으며,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를 지지했던 사람들이라고 묘사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요컨대 산업화 세대의 막내이자 민주화 세대의 맏형이다. 격동의 현대사를 살아온 이들이 2012년 지금 한국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보수 지지 세력으로 자리매김한 이유는 무엇인가. 무척 혼란스럽다. 나도 올해 5학년으로 진급했다. 최백호의 노랫말처럼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마는”, 그래도 때때로 가슴이 시린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나이 듦에 따른 개인적 차원의 보수 회귀 현상만으로는 앞서 언급한 그 엄청난 숫자들을 다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이들 50대가 집단적으로 과거의 기억, 과거의 낭만을 잃어버린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문재인 후보, 나아가 진보진영이 이들 50대의 비어 있는 가슴을 보듬어주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경제학자가 이런 정치·사회 현상을 해석하는 것은 주제넘은 짓임에 틀림없지만, 자기반성 차원에서 한마디 한다. 이번 대선의 핵심적 정책 이슈는 ‘경제민주화’였다. 아무리 박근혜 후보가 선수치고 베끼고 물타기했기로서니, 경제민주화 담론에서 문재인 후보가 밀릴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도 졌다. 20~40대를 투표장에 불러낼 수는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50대가 몰려나와 박근혜 후보에게 몰표를 던졌다. 경제민주화 담론이 50대의 빈 가슴을 채워주지 못한 것이다. “경제민주화가 중요한 줄은 알겠는데, 그게 내 삶과 무슨 상관이냐?”는 의구심에 답을 주지 못했다.


내 별명이 ‘재벌개혁 전도사’ 내지 ‘재벌 저격수’다. 지난 10여년 동안 재벌개혁을 위해 나름 열심히 노력했다. 그럼에도 나는 이번 대선에서 경제민주화의 의미가 재벌개혁으로 축소되고, 특히 출총제 부활·순환출자 금지 등의 몇몇 사전적 규제조치가 재벌개혁의 성패를 좌우하는 열쇠처럼 논의되는 것에 대해 여러 차례 우려를 표명했다. 재벌개혁은 경제민주화의 출발점일 뿐이고, 경제민주화의 본령은 하도급 중소기업, 비정규직 노동자, 영세 자영업자 등으로 상징되는 양극화 문제를 해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중소기업 부문에서 제대로 된 일자리를 만들어내야만 비정규직·골목상권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그래야 복지국가와의 선순환도 이룰 수 있다. 그럼으로써 재벌 중심의 낙수효과에 의존한 박정희 개발독재 모델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개념들은 여전히 추상적이었고, 그 연결고리가 여전히 모호했다. 더구나 대선을 불과 1년(문재인), 3개월(안철수) 앞두고 정치 무대에 등장한 후보들에게 체화되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설득에 실패했다. 특히 하루하루 먹고사는 문제로 고단하고 불안하기 짝이 없는 50대에게는 너무나 공허했다. 그래서 이들 50대는 ‘경제위기론’을 앞세워 ‘경제민주화와 경제성장의 투 트랙’을 설파하면서 ‘민생 대통령’을 약속한 박근혜 후보에게 끌렸다. 그래서 졌다.


한국의 보수진영은 ‘박정희 표 성장모델’에 ‘박근혜 표 법치주의’까지 결합하는 모습으로 진화했다. 이는 중대한 발전이다. 이에 대해 진보진영이 ‘부녀 합작의 사기’라는 식으로 대응한다면, 백전백패다. 그래서는 돌아선 50대의 가슴을 채워줄 수 없다. 진보진영의 발본적 혁신이 필요하다. 새로운 리더와 새로운 비전으로 5년간 치밀하게 준비해야 한다. 이 겨울, 왜 이렇게 가슴이 시리냐? 나는 오늘도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를 듣는다.


* 이 글은 경향신문 12월 24일자에 실린 글로 필자의 양해를 얻어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