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진 책임 제대로 물을 장치부터 만들어야

이지수 |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 연구위원, 미국변호사   작성일시: 작성일2012-12-03   

경영판단원칙(business judgment rule)은 미국에서 판례법상 발달한 법리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명문규정이 없지만 간혹 판례에서 이 원칙을 일부 차용하고 있다. 배임죄에 이 원칙을 도입하자는 주장에 따르면 상법상 배임죄는 민사의 형사화를 촉진하고 죄형법정주의에도 어긋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논리는 자칫 잘못하면 재벌들의 편법적인 행위마저 면책시켜줄 위험을 안고 있다.


먼저 경영판단원칙을 도입하기 위해 반드시 고려돼야 할 전제조건을 소개하고자 한다. 경영판단원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사의 책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 타인의 자산을 위탁받아 운영하는 자는 선량한 관리자의 의무 또는 신인의무(duty of trust)를 부담하게 된다. 이러한 의무는 다시 주의의무(duty of care)와 충성의무(duty of loyalty)로 대별된다.


두 의무를 구별하는 기준은 의사결정을 내린 자에게 이해상충(conflict of interests)이 있었는지 여부다. 이 가운데 경영판단원칙에 의해 보호되는 영역은 이해상충이 없는 주의의무 위반의 경우다. 반면 충성의무 위반에 대해선 경영판단원칙에 의한 보호를 받을 수 없다.


이를 풀어서 써본다면 회사의 의사결정에 참여한 자가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선의의 입장에서 내린 결정이라면 그 결정이 설사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 하더라도 법원이 사후적으로 이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이 경영판단원칙이다. 그러나 의사결정에 참여한 자가 어떠한 형태로든 이해상충이 있었다면 법원은 그와 같은 결정이 이기심에 근거한 것으로 봐서 그 의사결정에 대한 결과뿐만 아니라 그 과정까지도 면밀하게 들여다보게 된다. 이를 ‘완전한 공정성(Entire Fairness)’이라고 부른다. 즉 이해상충이 있었다면 경영판단원칙은 처음부터 배제된다.


우리나라의 업무상 배임죄는 어떠한가. 배임죄를 저지른 경영진이나 이사들 중에서 이해상충으로부터 자유로운 자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나라에서 배임죄로 처벌되는 사건들은 대부분 회사나 전체 주주의 이익보다 자신들의 이익을 우선시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충성의무 위반에 해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의의무나 충성의무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구별 없이 모든 경우를 경영판단원칙으로 보호해 줘야 한다는 것은 너무 위험한 발상이다.


백보를 양보해서 상법상 경영판단원칙이 반드시 도입돼야 한다면 몇 가지 전제조건이 반드시 충족돼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이 개인 간의 법적 구제절차가 실질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절차적인 장애를 제거해야 한다. 다중대표소송 내지는 단독주주권에 의한 대표소송 청구권 등이 인정돼야 한다는 얘기다. 또 충성의무 위반 사건의 경우 원고로부터 피고에게로 입증책임이 전환되도록 하는 등의 절차적인 정비가 우선해야 한다. 거의 모든 입증책임을 원고가 부담하는 상황에서 업무상 배임죄마저 경영판단원칙으로 보호를 해준다면 억울한 피해자들의 구제는 더욱 힘들어진다.


피해를 본 자가 책임이 있는 자에게 충분하고도 공평하게 법적 구제를 청구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된 다음 경영판단원칙의 도입을 논의해야 순서가 맞다. 제대로 된 법리의 이해 없이 국민들을 선동하는 듯한 태도는 옳다고 할 수 없다.


* 이 글은 중앙일보 12월 3일자에 실린 글로 필자의 양해를 얻어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