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와 현실

이총희 | 경제개혁연구소 연구위원, 회계사   작성일시: 작성일2020-12-15   

학생들과 한 번도 얼굴을 대면하지 못한 채 학교가 종강을 한다. 단순한 지식 전달자가 될 거라면 굳이 대학 강의를 맡지 않았을 것이다. 지식을 넘어 학생들의 고민도 나누고 싶어서 맡았던 대학교 강의는 코로나19로 인해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게다가 전달한 지식이 현실에서 외면받는 것을 보니 허탈한 생각마저 든다. 현실과 괴리된 지식이 문제일까. 지식과 괴리된 현실이 문제일까.


학생들에게 한 학기 동안 기업법과 회계감사에 대해 가르쳤다. 모두 기업활동과 밀접하게 영향을 주고받는 분야다. 하지만 기업활동의 최일선에서 교과서의 이야기는 낭만적인 소리인 경우가 많다. 학생들에게 제3자배정 유상증자는 재무구조 개선, 신기술 도입 등의 사유에만 가능하다고 가르쳤다. 그런데 강의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진칼이 제3자배정 유상증자를 하게 되었다. 한진칼의 유상증자는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합병을 위한 것이라 신기술의 도입도 아니고, 재무구조의 개선도 아니다. 학생들에게 자세히 설명하지 않은 ‘등’에 해당될 수 있다고 위안하기엔 스스로가 머쓱해진다. 역시나 세상은 이론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물론 교과서대로 말만 하는 것은 참 쉬운 일이고, 그것대로 살아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항공산업을 살리기 위한 현실적인 어려움, 다급함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이해는 한다. 대기업은 전후방으로 연관된 산업이 많고, 많은 고용을 책임지는 등 살려야 할 이유가 차고 넘친다. 하지만 한번 깨진 신뢰는 다시 만들기 어렵다. 이미 우리 사회는 불신에 대한 비용을 상당히 많이 지불하고 있다. ‘인위적’ 구조조정은 없다는 발언이 자연스러운 구조조정은 있을 수 있다는 것으로 들리는 것은 내 마음이 삐뚤어진 것일까. 그때는 또 어떤 위기로 지금의 원칙을 무너뜨릴까. 내 마음속에서 꼬리를 무는 이런 생각도 우리 사회의 불신비용이다.


그래서 위기일수록 원칙이 중요하다. 특히나 국책기관이라면 말이다. 상시적 위기체제인 우리나라에서, 기업들은 늘 위기를 외치며 탈법을 합리화한다. 중소기업에 대한 갑질이 나오고, 근로자들은 위험으로 내몰려도 법률 위에 기업의 위기가 있다. 위기가 내면화된 개인들도, 언제 뒤처질지 모르기에 늘 더 많은 것을 갈구하고 살아간다. 그래서 부동산은 끝없이 오르고, 부의 양극화는 점점 심해져간다. 이런 기업과 국민을 달래야 하는 국책기관이 먼저 원칙을 깨고 나온다면, 과연 그들의 말을 누가 신뢰하게 될까 싶다.


정부의 행동은 정치적인 백마디 말보다 더 확실한 신호를 준다. 두 대형 항공사를 합병하며 대마불사임을 보여줬으니 젊은이들은 대기업 취업에 더욱 목숨을 걸 것이다. 1등에겐 특권이 따르는 것을 보며 법과 규정을 따르기보다는 좋은 성적을 거둬 순위의 앞자리를 차지하려는 끝없는 경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소액주주를 외면하고, 중소형 항공사는 외면해도 위기상황으로 합리화되는 모습을 보며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을 더 내면화할 것이다.


이론대로 현실이 되지 않는 건 우리가 이론을 실천할 용기가 없어서다. 모두가 용기 없는 사회에서 용기를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인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젊다는 이유로 용기를 강요하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정작 어른들은 비겁하게 피해가면서 말이다. 노력은 배신하지만 포기는 배신하지 않는다는 자조는 이런 세상에 대한 그들의 답일지 모른다. 원칙을 따르지 않는 젊은이들을 비판하기 전에 이들의 모습은 우리가 만든 게 아닌지 먼저 돌아봐야 할 것이다.


​​* 이 글은 경향신문 12월 15일자에 실린 글로 필자의 양해를 얻어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