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브로 망한다

이창민 | 경제개혁연구소 부소장, 한양대 교수   작성일시: 작성일2020-11-10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대선 불복이 전 세계의 화제다. 환상에 둘러싸인 미국 민주주의의 치부가 드러난 거 같다. 앞으로 미국이 다른 국가의 민주주의에 훈수를 두는 일이 우습게 되어버렸다. 그렇다. 개인도 국가도 적정선을 지킬 줄 알아야 불행을 막는다. 그런데 그게 쉬운 일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망해가고 있을 때 느끼지 못한다. 조금씩 망가지기 때문이다. 미국의 두 가지 단면을 소개한다.


미국은 시장경제의 성지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경쟁과 활력이 넘치는 것 같다. 글쎄올시다이다. 1996년에 피크를 찍을 때 미국 국내 상장기업 숫자가 8025개에 달했다. 그런데 그 숫자가 지속적으로 줄더니 2012년에 4102개다. 2012년 한국 상장기업 숫자가 1710개다. 미국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우리의 10배쯤 되는 것을 감안하면 미국 상장기업 숫자가 너무 적다.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이 인수·합병이다. 엄청난 인수가 기업 숫자를 줄였다. 공정거래 당국의 무력화, 거대 기업의 출현, 독과점화가 원인과 결과로 따라붙는다. 오죽하면 공화당과 민주당이 구글·애플·페이스북·아마존의 경제력 집중에 공감대를 형성했겠나.


소득분배를 보자. 미국은 기업들이 주주총회 자료에 최고경영자(CEO) 연봉 비율이라는 것을 공개한다. CEO 연봉이 회사 중위(median) 연봉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2020년 기준으로 월마트 CEO는 중위 소득자의 983배를 받고 있다. 중간자는 2500만원 받고 CEO는 245억원 받는다. 과하다. 어느 순간부터 미국 CEO들은 사회의 눈치를 안 보기 시작했다. CEO 간 동료 그룹을 정하고 자기들끼리 서로 비교하면서 연봉을 밀어올렸다. 미국 민주당 내에서 기업 이사회에 노동자대표를 집어넣고 소득분배를 개선해야 한다는 말이 나올 법도 했다.


공정경제 3법이 본격적인 논의에 들어갔다. 아직도 더불어민주당 안에서 기업의 부담을 덜어준다는 명목 하에 총수의 민원을 반영하는 사람들이 활약하고 있다. 미국을 보자. 수많은 이민자들의 기여로 쌓아올린 세계 최강국 위상이 온전히 백인들의 힘이었다고 선동하는 무리가 있다. 그냥 놔두면 알아서 잘 돌아가는 것이 시장이라면서 매년 거대한 기부금을 정치인에게 주고 정책을 자기 입맛에 맞게 만들려고 하는 게 미국의 대기업 엘리트들이다. 최근 30년간 엄청나게 연봉 격차를 벌리면서도 고액 연봉은 온전히 자기들의 뛰어난 능력의 대가라고 CEO들은 주장한다.


우리 재벌이 연상된다. 문어발 계열사 왕국을 이룬 것도, 외환위기를 극복한 것도,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는 것도 다 가문의 능력이다. 미국의 경제력 집중은 거대 단일 기업의 시장 지배이지만 한국의 경제력 집중은 거대 그룹의 정치, 경제, 사법, 언론 지배다. 수많은 계열사가 얽혀 있기 때문에 대마불사의 혜택을 입는다. 법원도 이런 이유로 총수 사법처리에 관대하다. 자산운용사들은 재벌들에 독립적으로 의결권을 행사하기 어렵다. 전주의 마음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총수들은 계열사의 수많은 자리(고문, 자문, 사외이사 등)를 통해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만든다. 재벌끼리는 너무 많은 산업에서 이해관계가 얽혀 서로 협조한다. 서로 교차해서 주식도 보유하고 주주총회에서 백기사로 나서주는 건 당연하다. 얼마 전 한국타이어-한국도자기 3세들끼리의 수상한 계열사 거래가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린 뉴딜도 좋고, 2050 탄소 중립도 좋다. 근데 정치의 또 다른 역할은 한 발짝 떨어져 국가의 흥망성쇠를 파악하는 거다. 힘이 집중되고 활력이 떨어지면서 국가는 시나브로 망해간다. 영원한 제국은 없다.


​* 이 글은 국민일보 11월 10일자에 실린 글로 필자의 양해를 얻어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