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 없는 ‘포이즌 필’ 법안

김우찬 | 경제개혁연구소 소장,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작성일시: 작성일2009-11-12   

법무부는 지난 9일 신주인수선택권(포이즌 필·poison pill) 도입을 위한 상법 개정안을 내놓았다. 포이즌 필은 기업을 적대적으로 인수하려는 외부 주주가 주식을 일정 지분 이상 취득할 경우 해당 주주 외의 주주들이 행사할 수 있는 신주인수권을 의미한다. 가격이 시가보다 매우 낮게 책정되기 때문에 신주인수권을 행사 못하는 외부 주주의 지분은 크게 희석된다. 결국 재산상 손실을 염려해 어떤 주주도 적대적 공개매수를 시도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포이즌 필은 효과적인 경영권 보호장치가 된다.


있지도 않은 ‘적대적 위협’ 전제


법무부는 포이즌 필 도입과 관련해 몇 가지 전제와 논거들을 제시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두 가지에 대해 타당성을 따져보자. 먼저 적대적 경영권 위협이 상당하다는 전제다. 포이즌 필은 적대적 공개매수를 통한 기업인수에 대해서만 위력을 갖는 경영권 보호장치다. 또 다른 형태인 위임장 대결을 통한 이사회 장악과는 관련이 없다. 따라서 두 가지 형태 중 적대적 공개매수를 통한 기업인수 위협이 상당할 때만 그 도입에 정당성이 인정된다. 그러나 경제개혁연구소에 따르면 적대적 공개매수는 우리나라에서 지난 10년간 연평균 1~2개 회사에 대해서만 발생했다. 외국인에 의한 적대적 공개매수 제의는 10년간 1건뿐이었는데 그나마 실패했다. 결국 법무부는 있지도 않은 위협을 전제로 포이즌 필 도입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법무부는 공격법제와 방어법제 사이에 불균형이 존재하므로 포이즌 필을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공격법제와 방어법제의 균형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은 지당한 말이다. 하지만 포이즌 필 도입 주장은 적대적 공개매수의 요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나온 주장이다. 적대적 공개매수란 인수 의도가 있는 기업이나 사람이 회사의 소액주주들이 소유한 주식을 관련 법규에서 정한 공개매수 방법에 따라 사들이는 것을 말한다. 매수가 공개적이고, 다량으로 이뤄지며, 법규상 규제를 받는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일반적 주식 매입과 차이가 없다. 이에 대한 방어는 회사 소액주주들이 인수 의도가 있는 자에게 주식을 매각하지 않도록 소액주주들을 설득하거나, 경영을 잘해 주가를 공개매수 가격 이상으로 끌어 올리거나, 대항매수(counter bid)를 하는 것이다. 즉, 최종 결정권은 소액주주들에게 있는 것이고, 인수하고자 하는 자와 경영진은 ‘동일한 수단’을 동원해 이들의 마음을 사려고 경쟁해야 한다. 그 이상의 권한을 기존 경영진에 부여하면 그때부터 불공정한 경쟁이 된다.


다른 나라의 흉내내기 아닌지


영국에서는 이 점을 중요시해 ‘이사회 중립의 원칙’이라는 법리를 만들어냈고, 이에 입각해 일체의 경영권 방어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대신 공개매수에 대한 규율을 강화해 30% 이상의 지분을 매입하면 나머지 70%의 지분에 대해서도 매수 제의를 해야 하는 의무공개매수제도를 두고 있다. 유럽연합(EU) 집행부도 2002년 영국식 규율체계와 흡사한 EU 공개매수 지침을 제안했다. 2003년 회원국들에 자율권이 부여된 형태로 수정안이 채택되긴 했지만, 전체 회원국의 72%(2006년 8월 현재)가 이사회 중립의무를 채택했다. EU 집행부는 적대적 인수·합병을 통해 역내 자본시장을 발전시키고, 경제의 효율성을 끌어올려 미국 경제를 추월하겠다는 장기 비전을 갖고 EU 공개매수 지침을 내놓았다. 우리 정부는 장기 비전 없이 “다른 나라가 도입했으니 우리도 해야 한다”는 논리다. 너무도 대비되어 안타까울 따름이다.


* 이 글은 경향신문(2009년 11월 12일)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