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의 경험

이창민 | 경제개혁연구소 부소장, 한양대 교수   작성일시: 작성일2020-03-31   

한 연구는 어렸을 때 토네이도, 홍수 등 재난을 겪은 최고경영자(CEO)들의 행동을 분석했다. 심각한 재난을 경험했을 경우 그렇지 않은 CEO에 비해 훨씬 더 보수적이다. 흥미롭게도 재난의 여파가 적당했을 경우 재난을 겪지 않은 CEO에 비해 더 공격적인 경영을 한다. 부채 비율이 높고, 인수·합병(M&A)을 많이 하지만 현금 보유는 적다. 과도하게 위험을 회피하는 경향도 생기지만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자신감도 생긴다는 거다.


우리에게는 두 번의 경제위기 경험이 있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다. 교훈이 필요하다. 우선 위기 대응과 원론적 처방을 섞지 말자. 적기에 특정해서 한국 시장에 맞게 쏟아부어야지 공자님 말씀이 필요한 게 아니다. 최근 한국경영자총협회, 전국경제인연합회의 건의가 대표적이다. 경제 체질 개선을 명분으로 노동시장 유연화, 규제 완화 등을 요구했다. 외환위기 당시 IMF가 요구한 정책은 재정 건전성, 고금리, 구조조정 등이었는데 위기 대응을 시장에 맡겨 버린 꼴이었다. 노벨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 등은 당시에도 불난 집에 부채질한다고 IMF를 들이받았다. 한국적 특수성이 제거된 정책의 후과는 온전히 우리의 몫이었다.

두 번째, 지금은 관료와 한국은행의 시간이다. 서랍 속의 경험과 아이디어를 다 꺼내고, 책임은 대통령과 정치권이 지자. IMF와 구제금융을 체결한 1997년 12월 3일 원·달러 환율이 1200원대였으나, 그달 24일 약 2000원까지 치솟았다. 결국 시장을 안정시킨 정책들이 뭐였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경험과 정보를 가진 집단이 몸을 사리지 말아야 한다. 미국을 보자. 전 연방준비제도 의장 벤 버냉키와 재닛 옐런의 지원사격과 함께 연준은 전방위 자산 매입 등 광폭 행보를 했다. 한 연구에 따르면 2013년 미국 국내총생산(GDP)이 금융위기 이전의 추세였다면 달성했을 GDP보다 10% 포인트 낮았다. 위기 시 연준이 기준금리를 5%에서 0.2%까지 끌어내렸으나 빠른 회복을 위해서는 -4%까지 필요했다는 추정이다. 이런 금리는 불가능하다. 결국 이번에 강한 재정정책을 내놓았다. 이미 제로 금리인 연준은 무제한 양적완화를 주저하지 않았다.

세 번째, 향후 구조조정 대응이다. 정부가 적극 개입해야 한다. IMF 위기 당시 구조조정의 공포가 경제주체들을 얼어붙게 했다. 매일 기업들이 쓰러져 나갔다. IMF 위기에는 한보가, 글로벌 금융위기에는 AIG, GM 등이 시장 불안의 촉매제였다. 벌써 많은 사람은 보잉을 주목하고 있다.

한국도 조선, 중공업, 항공 등을 위주로 소문이 돈다. 위기를 일괄 구조조정의 계기로 삼지는 말자. 구조조정은 산업정책이지 위기 대응 수단이 아니다. 또 구조조정 폭풍이 부동산 시장을 건드릴 수 있다. 가격이 폭락하면서 실물경제를 어떻게 타격하는지 두 번의 위기는 생생히 보여줬다. 2008년 금융위기는 미국의 성장 능력을 끌어내렸다. 2013년 미국의 잠재적 GDP가 금융위기 이전 추세보다 7% 포인트 낮았다. 이건 비단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고, 주요 원인으로 지목받는 것이 대규모 실업이다. 실업은 당장도 힘들지만 유산을 남겨서 미래를 괴롭힌다. 당연히 양극화 문제도 심화시킨다.

모두가 힘든 시기이고 얼마나 더 힘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 정책 결정자들의 수준이 ‘국가 부도의 날’ 수준은 아니다. 다만, 위기의 경험이 그들을 위험 회피적으로 만들지 않았기를 빈다. 아래에서 정책 들고 오면 수장이 결단과 돌파를 해주시라. 그게 위에 있는 이유다.

​* 이 글은 국민일보 3월 31일자에 실린 글로 필자의 양해를 얻어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