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수의 품격

이창민 | 경제개혁연구소 부소장, 한양대 교수   작성일시: 작성일2020-03-03   

우리에게 어려운 시절은 이미 예견돼 있었다. 80, 90년대의 고도성장은 언감생심, 당분간 저성장의 시대를 감내해야 한다는 거다. 성장능력 자체가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코로나19까지 덮쳤다. 이것이 얼마만큼의 생채기를 낼지 우리는 모른다. 이럴 땐 분노보다는 지혜가 필요하다.

경제학계의 슈퍼스타 대런 아세모글루(미국 MIT 교수)는 제도가 국가의 경제성장을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포용적 정치제도가 권위주의적 제도보다 지속적 성장을 담보한다는 식이다. 수백년을 가로지르는 실증 분석도 멋지지만 더 탁월한 점은 제도를 만드는 것은 권력층인데, 이들의 개인적인 동기가 무엇인가를 파헤친 것이다. 정치권력의 왜곡된 동기가 제도를 뒤틀고, 잘나가던 국가도 나락으로 빠진다.

최근 하버드, MIT, 스탠퍼드대학 등의 경제·경영학자들 주도로 기업버전 연구들이 등장하고 있다. 기업의 성장은 무엇이 결정하는가. 기존의 대답은 연구개발, 특허, 신기술 도입 등이다. 혁신경제를 부르짖는 이유다. 문제는 이것으로 설명되지 않는 퍼즐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들이 맞춘 퍼즐의 한 조각은 경영규준(Management Practice)이라 불리는 기업의 제도다.

좋은 경영규준은 무엇인가. 기업의 장단기 목표는 명확한지, 구성원에 대한 소통과 감독은 원활한지, 평가·승진·인재채용은 객관적이고 투명하게 이뤄지는지, 일을 열심히 할 인센티브는 충분히 갖춰져 있는지 등이다. 좁게 해석하면 좋은 기업지배구조다. 결국 우리의 특성상 총수와 가신집단이 만들어야 하는 제도다. 주어진 자원(노동과 자본)을 가지고 능력의 최대치를 끌어내는 경제 권력자들의 예술인 거다.

눈치챘겠지만 개념이 딱히 새롭지 않다. 연구자들의 노력이 빛나는 건 여기서부터다. 우선 좋은 경영규준은 국가 간, 기업 간 총요소생산성 격차의 무려 30%를 설명한다. 34개 국가의 1만1000개 넘는 기업자료를 이용한 분석이다. 지배구조를 개선하면 생산성을 상당히 끌어올릴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좋은 지배구조는 회사의 특급기밀이 아니다. 주변에서 모범사례를 구하기 어렵지 않고, 전파효과(spill-over effect)가 있다는 것도 검증됐다. 구글의 기업문화를 보시라.

그럼 쉽게 배울 수 있는 제도를 왜 도입하지 않는가. 우선, 창업주 일가에서 나타나는 자기만의 비법에 대한 집착이다. 이게 유훈통치로 나타나고, 좋은 지배구조는 국가마다 다르다며, 경영간섭 말라며 자기 방어에 나선다. 여기에 지식인 집단(학계, 싱크탱크, 언론 등)의 지원사격이 있다. 둘째, 제도를 바꿔야 하는 총수·가신집단의 개인적 이해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좋은 지배구조는 총수의 사적이익을 줄이니 당연히 그들에게는 달갑지 않다. 또한 가신집단들이 총수에게 전략적으로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고 있을 가능성은 없을까.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은 21년 만에 이사회 의장을 내려놓으면서 등기임원에서 물러났다. 고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은 90세가 넘어서까지 등기임원을 내려놓지 않았다. 누군가는 방울을 달아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다.

어려운 시절에 총수일가에게 묻는다. 스스로의 품격을 높이기 위해 어떤 비전을 가지고 있는가. 다가오는 주주총회에 주주들에게 어떤 희망을 줄 수 있는가. 새로운 먹거리 창출이 필요하지만 그걸 만들기 위해서는 엄청난 투자와 오랜 시간이 걸린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게 있다. 과감히 자신을 버려야 한다. 그래야 자기도, 기업도, 세상도 다시 살아난다.

​* 이 글은 국민일보 3월 3일자에 실린 글로 필자의 양해를 얻어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