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노멀 시대의 경제민주화 2

김상조 | 경제개혁연대 소장, 한성대 교수   작성일시: 작성일2016-02-29   
지난번 칼럼에 이어 뉴노멀(New Normal) 시대의 경제민주화에 대한 고민을 풀어본다. 2008년 미국의 월스트리트가 붕괴했을 때, 진보진영의 분위기는 대충 이러했다. 1980년대 이래 폭주하던 신자유주의 시대가 드디어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고. 그리고 2차대전 후 자본주의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케인스적 복지국가 모델이 다시 부상할 거라고. 다들 그렇게 희망했다.


그런데 그 희망에는 결정적 결함이 있다. 새로운 질서가 안착하기까지의 과도기가 얼마나 길지, 그 과도기적 비용이 얼마나 클지에 대한 고려가 없었다. 세상이 뒤집어졌는데도 별일 없었다는 듯이 신자유주의 시대가 지속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복지국가 시대로의 순조로운 복귀가 예정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지금의 세계경제 환경은 한 세기 전의 암흑기와 똑 닮았다. 국제적 불균형(global imbalance)이 폭발하면서 30년간에 걸쳐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대공황이라는 대참사를 연출했던 20세기 전반기 말이다.

당시의 혼란을 경제사학자들은 이렇게 설명한다. “영국은 의지는 있으나 능력이 없고, 미국은 능력은 있으나 의지가 없다.” 패권국가가 교체되는 세계사적 전환기의 혼란을 축약한 표현이다. 여기서 ‘영국 대 미국’을 각각 ‘미국 대 중국’으로 바꾸어 놓으면, 지금의 G2 리스크에도 딱 들어맞는 설명 아닌가? 국제공조 노력을 통해 세계대전이나 대공황의 재발을 막을 수는 있겠지만, 양적완화 등의 돈 쏟아붓기만으로는 국제적 불균형을 해소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하다. 2008년 위기는 또 다른 30년의 격변기를 예고한 것이었고, 이제 겨우(!) 7년 지났을 뿐이다. 터널의 끝을 가늠할 수조차 없다.

그러면 이 뉴노멀의 시대에 우리는 어떤 전략으로 생존을 유지해야 하고, 나아가 경제민주화를 추진해야 하는가. 이런 고민 속에 나는 이미 2012년에 ‘경제민주화의 최소강령’이라는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했고, 출총제·순환출자·금산분리 등 ‘전통적 재벌개혁 이슈’가 선거쟁점으로 부각되는 것에 우려를 표했다. 경제민주화 열풍으로 들끓던 시기에, 더구나 재벌 저격수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내가 이런 말을 했으니 뜻밖이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지금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는, 특히 진보진영에 일반화된 경제민주화의 의미와 수단은 1987년에 형성된 것이다. ‘단군 이래의 최대 호황’ 속에서 대학생과 넥타이부대가 직선제 개헌까지 쟁취했다.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의 노력이 함께 어우러져 한국 현대사의 정점을 찍었다. 경제는 성장하고 재벌은 돈을 벌었다. 민주화된 정부가 재벌의 경제력 집중을 통제하고 성장의 과실을 나누는 것이 곧 경제민주화로 이해되었고, 1987년 헌법의 경제민주화 조항과 1987년 개정 공정거래법에 도입된 출총제 등의 재벌규제 장치들은 모두 이런 상황 속에서 태동한 것이다.

그로부터 사반세기가 지났다. 한국경제의 규모와 구조는 과거와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달라졌으니, 이제는 공정거래법의 경직적 규제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별로 없다. 더구나 지난번 칼럼에서 언급했듯이, 한국경제를 둘러싼 환경적 요인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요컨대, 경제는 성장을 멈추었고, 돈을 버는 기업을 찾기가 어렵다. 중국은 여러모로 이미 우리를 추월했다. 당연히 경제민주화 추진 전략을 재검토해야 한다. 4년 전의 공약집을 ‘표지갈이’하는 식으로는 결코 유권자의 마음을 얻을 수 없고, 경제민주화를 이룰 수도 없다.

그러면 ‘경제민주화의 최소강령’은 무슨 뜻인가. 첫째, 경제민주화는 단기 성장률을 끌어올리는 정책이 아니다. ‘성장친화적 진보’는 적확한 슬로건이나, 잠재성장률을 4%, 5%로 높이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경제민주화 또는 소득주도성장론은 기껏해야 3% 성장하는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으로 규정돼야 한다.

둘째, 대내외 위험요인 관리를 통한 국민경제의 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하면서, 구조개혁은 중기적 시계(時界)에서 현실적 수준을 목표로 추진해야 한다. 우리는 내일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는 시대에 살고 있다. 먼 미래의 장밋빛 설계도는 어차피 휴지조각이 될 공산이 크고, 실패 경험의 누적은 대중의 신뢰를 갉아먹는 독약일 뿐이다.


셋째, 훼손할 수 없는 원칙이 있다. 시장과 사회의 규칙을 위배하는 자에게는 엄중한 페널티를 부과하는 것이다. 현행 법제도의 공정한 집행만으로도 할 수 있는 것이 굉장히 많다. 정치적으로는 선명성이 떨어지지만, 대중의 삶을 개선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이것이 뉴노멀 시대 경제민주화의 최소강령이다.

* 이 글은 경향신문 2월 24일자에 실린 글로 필자의 양해를 얻어 게재합니다.